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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동화적 상상으로 깨버린 반공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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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1915~2000)의 <학>/「신천지」52호(1953.5)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접전 지역의 한 초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만무방'을 보면 주인공인 초가 주인여자는 낮에는 태극기를, 밤에는 인공기를 걸어두는 장면이 나온다. 전쟁의 참혹성과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 과거군사정권 시절 납북됐다 귀환한 사람들이 남쪽에서는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사는 경우도 허다했고 북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국가로부터 버림받곤 했다. 한편 이들 납북자들과 북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정권과 단체를 향해 빨갱이라고 비난한다.

해방 후 찾아온 남북분단과 6.25전쟁은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한국사회 전반에 뒤틀린 질서를 태동시켰다. 이데올로기라는 괴물은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일거에 정화시켜 버리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허물어진 오늘에도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그것이다. 이 이념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반공 이데올로기다. 황순원의 소설 <학>은 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신화를 보기좋게 허물어 버린다. 그것도 전쟁 와중에,


교과서에서 배운 황순원 소설 <학>의 주제는 휴머니즘이었다. 그러나 황순원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소설 <학>을 통해서 전달하려 했던 메세지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무력화가 더 가깝지 않나 싶다. 황순원 자신이 바로 반공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휴머니즘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 짧은 <학>의 가장 큰 구성적 특징이라면 일반 소설에서 보이는 사건 전개의 개연성이 희박하다는 점이다. 오로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만을 향해 달려가는 동화처럼 느닷없는 결론이 작가의 의도였건 아니면 작가의 실수였건 극적 반전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다만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통해 극적결말을 짐작케 할 뿐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의 삼팔 접경 북쪽 마을,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이 마을에 치안대원으로 들어온 성삼이는 인민군 점령시절 농민동맹 부위원장을 지낸 단짝 동무 덕재를 호송하게 되었다. 덕재를 바라보는 성삼이의 심정은 복잡하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적이 아닌 어릴 적 단짝 동무로 남고싶은 성삼이다. 

성삼이는 새로 불을 댕겨 문 담배를 내던졌다. 그러고는 이 덕재 자식을 데리고 가는 동안 다시 담배는붙여 물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리고는 사람을 몇이나 죽였냐라는 성삼의 질문에 "그래 너는 사람을 그렇게 죽여봤니?"라고 대답한 덕재의 말에 가슴 한복판이 환해짐을 느낀다. 소설은 우연의 연속이다. 성삼이가 덕재를 호송하게 된 것도 그렇지만 호송중에 벌 한가운데 학떼를 보고 어릴 적 표본을 만들기 위해 총독부 허가를 맡고 온 사냥꾼에게서 학을 구해준 기억을 떠올리며 성삼이는 갑작스레 덕재에게 학 사냥을 제의한다. 덕재를 도망가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

"어이, 왜 멍추같이 게 섰는 게야? 어서 학이나 몰아오너라!"

작가 황순원이 소설의 개연성을 무시한 채 동화적 상상력으로 결말을 이끌어낸 데는 그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신념과 달리 생존을 위해서 보도연맹이라는 반공단체에 강제로 가입해 작가적 생명을 위협받는 등 반공 이데올로기에 짓눌린 자기검열의 덫을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휴머니즘을 지배하려는 이데올로기의 허무맹랑함에 대한 작가의 의도적인 희화화였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데올로기 대립이 정점으로 치닫던 전쟁 와중에 발표된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가 경험했을 이데올로기의 비정함을 짐작케 한다.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동화는 늘 통쾌하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읽은 동화가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은 악의 최후는 왜 파멸로 끝나야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전개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틀 속에서 이유를 막론하고 선은 승리한다는 게 동화의 공식이다. 황순원의 소설 <학>의 결말이 통쾌하기는 하지만 영 개운치 않은 뒤끝이 남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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