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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누가 쿨리(coolie)의 친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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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애의 <꺼래이>/1934년

 

19~20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과 인디아 노동자들을 쿨리(苦力, coolie)라고 불렀다. 이들은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저임금을 받는 아시아 출신 노예 정도로 여겨졌다. 쿨리의 어원이 힌두어 큘리(Quli, 노예)라고 하니 아직도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단다. 연관성은 확실치 않으나 아랍어에도 쿨리와 비슷한 발음의 쿠리(kuuri, 풀무질하는 사람)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다.

 

제국주의 시절 아시아인들의 이민역사는 지독한 가난에서 비롯되었고 눈물과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중국과 인디아의 이민사에 쿨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러시아 및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까레이스키, 남미로 건너간 애니깽으로 대표되는 슬픈 이민역사가 있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을 이 때 쓰는 것일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문화 시대의 도래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주변에서 심심찮게 외국인과 마주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역사의 필연인지 아이러니인지 역사의 반복은 비단 반복에만 그치지 않는다. 청산되어야 할 역사마저도 오롯이 되풀이하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기보다 차라리 잔인한 야수에 가깝다. 다문화 시대는 편견과 차별의 시작이라는 역설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별의 기준이 생각만큼 복잡하지 않다는 것도 잘못된 역사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다. 피부색의 농도에 따라 그 중간에 위치한 우리는 차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지배권력의 이방인이요 소외자인 시민과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해야 할 대상은 피부색이나 빈부의 차이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신애의 소설 <꺼래이> 8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하나의 숙제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이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백신애의 소설은 여성과 가난으로 집약된다. 그는 카프니 동반작가니 하는 거창한 문학인 단체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가난과 그 가난의 최대 피해자인 여성을 어떤 작가보다도 처절하게 또 섬세하고 묘사하고 있다. <적빈>에서 배설까지 참아가며 극복하고자 했던 가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면 <꺼래이>에서는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시민연대의 가능성과 소위 말하는 지식인의 빗나간 엘리트 의식을 고발하고 있다.

 

주인공 순이와 순이 가족은 아버지의 주검을 찾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났다가 경비대에 체포되어 추방되는 처지에 놓여있다. 순이 일행에는 코뮤니스트라 자칭하는 젊은이 둘과 중국인 쿨리 한 사람이 끼어있다. ‘꺼래이이는 러시아인들이 순이 일행을 부르는 말로 고려라는 뜻의 조선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이 연발하는꺼래이에는 무지몰식한 야만인, 무력하고도 불쌍한 인간들의 표본이라는 비아냥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이 고난의 길에서 순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위 지식인이라는 두 젊은이의 가식적인 엘리트 의식과 차별 속에 또 다른 차별을 감행하는 지식인의 양면성이었다. 죽음 앞에서 그들의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것들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 정작 극한의 상황과 맞서 싸우고 소외된 중국 쿨리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는 이는 다름아닌 나약한 여성 순이였다.

 

여보십시오. 공연히 그러지 마시오. 당신이 여기서 발악을 하면 공연히 우리까지 봉변을 하게 됩니다.”

여보시오. 우리를 또 감금한단 말이오? 우리 두 사람 코뮤니스트입니다. 우리는 감금받을 이유가없습니다.” -<꺼래이> 중에서-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시베리아와 간도 등지에서 유랑민의 삶을 직접 보고 경험했던 그는 관념적 이상주의에 빠져있던 당시 지식인들의 이중적 행태를 소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 그는 소설 <꺼래이>를 통해 동병상련의 아픔 즉 국적을 불문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백신애의 소설이 카프적 경향을 보이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21세기 한국은 또 다른 쿨리들이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불행히도 그들은 편견과 차별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 젊은이가 보여주었던 구호만 연대가 아닌 순이가 내민 따뜻한 손이다. 누가 쿨리(coolie)의 친구일까요? 누가 쿨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쿨리의 거친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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