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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역사의 뒤안길에는 대한민국 원주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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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2008/창비사

 

지난 1월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2년 전 차디찬 겨울의 한 복판에서 그들은 살을 에는 물대포 세례를 받아야 했고 급기야 추위를 녹위는 거대한 화염 속에 피끓는 절규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새까만 주검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분노했다. 심지어 국가가 망자들의 손목에까지 쇠고랑을 채웠을 때 국가는 한낱 거추장스러운 사치품에 불과했다. 여전히. 그들의 타들어가는 절규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할 만큼 그렇게 불순한 것이었을까? 단지 내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것 뿐이었는데, 국가에 더 달라고 손벌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 살던대로 그렇게 살게 해달라는 것 뿐이었는데...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지금 우리는 2년 전의 분노도 눈물도 어느새 기억 저 편에서 희미한 잔상만 아른거릴 뿐이다. 물보다 진하다며 지구 위 어디에나 있는 피의 정체를 '우리'라는 틀 속으로 특화시키기 좋아하는 우리(?)가 이렇게도 매정하고 야박하게 변했단 말인가! 아니면 잊혀지기를 갈망하는 권력과 그 졸개들의 농간에 분노마저 애써 가슴 한 켠에 묻어둬야할 만큼 세상이 무서워졌단 말인가! 이 무서운 현실의 다리를 건너 나는 먼 훗날 역사 박물관 구석에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을 용산참사 현장을 내 자식들에게 손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끄럽지만 귀찮아 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애써 설명하려 들 것이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그렇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평생 만화라곤 읽어본 적 없는 내가 최규석이라는 당돌한 젊은 작가가 당신도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며 소소한 자기 가족사를 보여주었을 때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을 새삼 되뇌이곤 했다. 단지 흑백사진 속 추억을 들춰내서가 아니다. 잊어야 할 것과 잊어서는 안될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내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최규석의 만화 <대한민국 원주민>은 그의 말대로 어디에나 있는 얘기다. 할머니 치맛폭에서 들었던 얘기일 수도 있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어느날 술주정으로 털어놓았던 얘기일 수도 있다.  어릴 적 1원짜리 동전 몇 개들고 노란 밧데리통 옆에 미닫이로 된 테레비 브라운관을 통해 박치기왕 김일을 보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만화다.  그런데 그가 안내한 과거 여행은 단순한 추억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땅의 주인처럼 살갑게 느껴지던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뜻밖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언은 아메리카의 원주민이다

저자는 말한다. '대한민국 원주민'을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 정도로 생각해 달라고, 그들은 한 때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 대륙의 주인이었다. '원주민'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영화만 추억해줄 뿐 지금은 백인사회의 주변인, 아니 과거 대륙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농촌에서 도시로 쫓겨간 사람들, 다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심에서 길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대한민국에서 '원주민'이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근대화도 개발도 기꺼이 양보했지만 정작 근대화와 개발의 저 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런 우리가 바로 '대한민국 원주민'이다.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저자는 말한다. "갑자기, 그리고 너무 늦게 세상의 흐름에 쉽쓸려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그 존재감이 미미해서 역사책에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들,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이들을 묻어두고 그냥 가기에는 서러웠다고, 그래서 이들을 '대한민국 원주민'이라 부르기로 했단다. 

근대화의 물결에도 미신에 의존했던 할아버지도, 철책선 잘라 술바꿔 드시고도 요즘 군대 썩었다고 말하시는 아버지도, 계집애가 무슨 대학이냐며 누이들을 공장에 보냈던 어머니도, 자신의 꿈은 공장 불빛에 묻어두고 동생들 학비 대느라 바빴던 누이도, 미국은 절대선이고 전쟁놀이에서도 미군은 절대 죽지 않아야 했던 나도, 소리없이 이 땅을 살아온 모두가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굳이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역사에 기록하고픈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이들이 대한민국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그렇다면 이 땅을 살아온 '대한민국 원주민'은 서러운 존재였기에 그렇게 기억하고 추억해야만 하는 존재들일까? <대한민국 원주민>에는 어디에나 있는 가족사를 통해 현실에 대한 작지만 강렬한 투쟁의지를 보여준다. 굳이 보여주지 않지만 굳이 말하지 않지만 '대한민국 원주민'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모순들이 속속들이 유추되고도 남는다. 

거대한 로보트와의 싸움인 한미FTA를 대하고도 '대한민국 원주민'들은 정신력만 있다면 못 이길 것도 없다고 세뇌받지 않았는가! 


저자는 만화 속에 자신을 등장시킴으로써 '대한민국 원주민'이 결코 박물관 유물로 사라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대한민국 원주민'이 또다른 신분으로 발전해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자는 결코 웃음을 놓는 법이 없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저자의 만화스런 웃음 속에는 희망이 있다.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혼돈 시대에 살고 있다. 아름다운 옛 것을 지켜야 할 보수는 미래를 얘기하고 과거를 얘기하는 진보를 향해 좌파니 빨갱이니 하면서 공격하고 있다. 서로의 편의에 의해서 교과서 속 가치관은 일대 혼란의 구렁텅이 속에서 제 모습이 불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보수는 아름답다. 진보는 눈부시다. 역사는 어느날 갑자기 '뚝딱'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서 전진한다. 그러니 미래만을 강조하지 말지어다. 과거와 단절한 미래는 썩은 악취만 진동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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