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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어느 전향 남편의 아내 폭행사건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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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김남천의 『처를 때리고』/「조선문단」속간11호(1937.6)/창비사 펴냄

작가 김남천은 1차 사상탄압 당시 검거되어 카프작가로는 유일하게 본심에 회부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남천이 피검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학활동 때문이 아니었다. 1931년 있었던  공산주의자 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카프 작가들 사이에서는 전향론이 제기되기에 이른다. 김남천도 얼마 후 위장 전향이니 진짜 전향이니 논란 속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는데 이 사건 이후 김남천은 임화와 함께 카프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민족주의 진영의 순수문학론에 반발해 문학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던 카프 작가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사라지게 된다.

김남천의 소설 『처를 때리고』는 이 사건이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전향자의 자기 고백적 냄새가 짙게 풍기는 소설이다. 한 때 사회주의 이념 투쟁을 벌였던 주인공, 그러나 전향 후에는 운동했을 때의 열정은 온데간데 없고 출판사업을 위해 자신의 소신마저 팔아버릴 수 밖에 없는 자기 고발 소설이다. 주인공 차남수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는 다름아닌 부부싸움이 계기가 되었다. 아내를 때리고 예상치 못했던 아내의 울분에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남편의 변

주인공이자 남편 차남수는 왕년의 사회주의자로 ○○계의 거두였다. 비록 전향은 했지만 여전히 이념에 경도된 완벽주의자다. 그가 아내를 때린 이유는 의처증이 분명해 보이나 그는 에둘러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아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내심 아내의 불륜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준호와 아내를 성적으로 농락했던 허창훈에게는 속으로 분노만 느낄뿐 아내에게 했던 것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그가 추진하고 있는 문화사업의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뿐이던가! 허창훈이와는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허창훈이는 ○○계의 거두였던 차남수를 이용하고 차남수는 이런 허창훈이를 이용해 생활비를 뜯어내고 있다. 이런 차남수의 전향 후 비굴하고 비열한 삶은 아내의 말을 통해 여지없이 폭로된다.

야 사회주의자 참 훌륭하구나. 이십 년간 사회주의나 했기에 그 모양인 줄 안다. 질투심 시기심, 파벌 심리, 허영심, 굴욕, 허세, 비겁, 인찌끼(사기), 브로커. 네 몸을 흐르는 혈관 속에 민중을 위하는 피가 한 방울이래도 남아서 흘러 있다면 내 목을 바치리라. -『처를 때리고』 중에서-

차남수는 반박하지 못한다. 반박할 수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아내를 때리고픈 충동을 느낀다. 지식인의 속물 근성은 아닐지 싶다. 비루한 인생이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아내를 통해 해소하려 한다. 아내를 때리는 그의 행동은 전향 후 달라진 자신에 대한 원망이자 분노의 표출이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아내의 변

이 부부가 싸우게 된 이유는 아내 최정숙이 준호와 저녁을 먹고 산책한 이유 때문이었다. 최정숙은 남편의 친구 준호와 의심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남편에게 굳이 속일 필요도 없었지만 한편 속여야만 했다. 최정숙은 준호와 산책하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남편에게는 없는 무엇을 준호에게서 본 것이다. 준호? 이 사람 요즘말로 하면 '나쁜 남자'쯤 되지 않을까!

최정숙은 남편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동안 평생 연인이자 동지였다. 최정숙이 준호에게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최정숙은 남편의 투쟁에 방해가 될까봐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지워야 했다. 게다가 시댁에서는 아들이 감옥을 드나드는 것도 여자를 잘못 만난 탓이라며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느날 최정숙은 남편의 첩이 되어 있었다. 최정숙이 준호와 산책하면서 느꼈던 흥분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하다.

미련한 이년은 십 년이 하루 모양으로 남편을 하늘같이 알고 비방과 핍박 속에서 더울세라 추울세라 남편만을 섬겼건만 그게 뒷날 첩으로 되어 쫓겨나게 될 줄만 몰랐다. -『처를 때리고』 중에서-

소설은 차남수와 최정숙의 변이 마치 무대 위에 선 배우들이 관객을 향해 내뱉는 방백 형식으로 전개된다. 아니면 독백. 전향자 차남수의 꿈은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준호의 고백으로 처참하게 무너진다. 문화사업의 동지라던 준호는 사업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듯 그동안 취직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소설은 현실에 대한 이상만 있을 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어느 전향자의 자기 고발로 막을 내리게 된다.

" 이년 이런 놈하고 산보할 때 너는 행복을 느끼느냐."
이렇게 처를 두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리고 싶은 마음은 결국 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불쌍한 심리였다. -『처를 때리고』 중에서-

혹시 이 사실을 아는가! 이명박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핵심 측근들이 과거 민중당 출신이라는 사실. 이재오 특임장관, 김문수 경기도지사, 차명진 전한나라당 대변인, 김용태 의원, 김성식 의원, 박형준 대통령실 사회특별보좌관...이들은 분명 MB와는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리를 보여주듯 이들은 좌에서 우로 급격히 전향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게 있다.

그들이 그토록 목숨처럼 떠받들던 민중이니, 서민이니, 시민이니 하는 것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새 주군에 의해 한낱 술판 안주거리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차남수처럼 자신의 비굴함과 비열함에 대한 일말의 자기 고발을 생각한 적이 있을까?
느닷없고 엉뚱한 호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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