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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노랑수건, 네가 강자(强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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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태준의 『달밤』/「중앙」1호(1933.11)/창비사 펴냄

강자가 살아남는다 하고 살아남는 놈이 강자라 한다
. 인간이란 참 간사하다. ‘호모○○○’, ‘호모○○○’, ‘호모○○○라는 난해한 말을 만들어 동물과 구분하려 들면서 정작 동물들의 세계인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진리인양 떠받들고 산다. 도대체 강자란 누구이며 어떤 놈이 살아남는단 말인가! 권력과 돈을 가진 자?, 뛰어난 머리와 빠른 발을 가진 자? 아니다. 약삭빠른 자가 강자다. 살아남는 자가 강자라면 분명 쥐처럼 약삭빠른 자가 강자임에 틀림없다. 약자가 만들어준 강자의 세상.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는 강자의 거만함인지도 모른다
 

이태준의 소설 『달밤』의 주인공 황수건은 빡빡 깎은 머리지만 보통 크다는 정도 이상으로 큰 짱구대가리다. 게다가 손과 팔목은 머리와는 반비례로 작고 가느다랗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의 별명은 노랑수건이다. 그는 못난이다. 세상의 오물을 뒤집어 쓰고 사는 나에게, 우리에게 노랑수건은 못난이일 뿐이다.
 

서울이라고 못난이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처에서는 못난이들이 거리에 나와 행세를 하지 못하고, 시골에선 아무리 못난이라도 마음 놓고 나와 다니는 때문인지, 못난이는 시골에만 있는 것처럼 흔히 시골에서 잘 눈에 뜨인다. 그리고 또 흔히 그는 태고 때 사람처럼 그 우둔하면서도 천진스런 눈을 가지고, 자기 동리에 처음 들어서는 손에게 가장 순박한 시골의 정취를 돋아주는 것이다. -『달밤』 중에서

 

노랑수건은 늘 당당하다. 거침이 없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못난이로 만들었고, 약자로 만들었고, 꼴찌로 만들었다. 나는 지금 달밤 그림자 뒤에 숨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인연

 

피천득은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하는 게 인연이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옷깃 인연을 말한다. 나와 노랑수건의 인연은 특별했다. 남들은 그를 못난이라고 상대하지 말라 하지만 나는 그의 엉뚱함에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는 인연을 맺고 말았다.

 

우리집 신문 배달원인 노랑수건은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한다. 엉뚱하지만 나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서로 무슨 말을 할지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다가도 늘 노랑수건이 선수를 친다. 노랑수건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아무리 오래 지껄이고 나도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중만 아니면 한참씩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달밤』 중에서-

 

그에게는 우스운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인지라 삼산학교 급사로 있을 때는 학무국에서 나온 시학관과는 되지도 않은 일본어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 종을 치는 것도 잊어버렸다 한다. 또 색시가 달아난다는 말을 무서워한 그는 어느 선생의 장난 말에 오십 분 만에 치는 종을 이십 분 만에, 삼십 분 만에 치고 집으로 뛰쳐가기도 했단다. 그러니 지금 신문 배달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노랑수건을 못난이라 부르지만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의 꿈은 월급 이십여원을 받고 신문사 옷을 입고 방울을 차고 다니는 원배달원이 되는 게 꿈이다. 지금은 원배달원이 떼어주는 몇 부를 배달하고는 고작 한 삼 원 받는 터다.

 

나는 그에게 이왕 꿈을 꾸는 것 신문사 사장이 어떠냐고 했더니 그는 가슴을 치며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원배달원이 됐다며 사람은 무어든지 끝을 바라고 붙들어야 한다고 나에게 일러주면서 돌아갔다.

 

우리도 그가 원배달원이 된 것이 좋은 친구가 큰 출세나 하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진실로 즐거웠다. 어서 내일 저녁에 그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차고 와서 쭐렁거리는 것을 보리라 하였다. -『달밤』 중에서-

 

중독

 

나는 이미 노랑수건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차고 나타나야 할 노랑수건이 며칠 째 보이지 않았다. 사흘 째 되는 날 요란스럽게 방울소리를 울리면서 찾아온 신문 배달원은 노랑수건이 아니었다. 누가 그런 반편에게 일을 맡기냐며 그나마 하고 있던 보조 배달마저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는 친구가 큰 사업에 실패한 것처럼 섭섭했다. 마음이 아팠다. 세상의 야박함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장사 밑천 하라며 돈도 줘봤지만 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늘 당당하게 찾아와서는 별의별 소소한 걱정을 다 해준다. 어느 날은 포도 대여섯 송이를 가지고 찾아왔다. 노랑수건이 무슨 돈이 있어서, 훔쳐온 것이었다. 쫓아온 주인에게 포도값을 물어주고 보니 노랑수건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그 다섯 송이의 포도를 탁자 위에 얹어놓고 오래 바라보며 아껴 먹었다. 그의 은근한 순정의 열매를 먹듯 한 알을 가지고도 오래 입안에 굴려보며 먹었다. -『달밤』 중에서-

 

연민

 

달은 차갑다. 달밤은 슬프고 애달프다. 노랑수건을 본 것은 달빛이 밝은 성북동 길 위에서였다. 노랑수건은 다 외우지도 못하는 노래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담배를 빨며 지나갔다. 전에 담배 피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도 세상이 원망스러웠나 보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달밤』 중에서-

 

노랑수건, 황수건은 세상 누구보다 깨끗하고 순박하다. 아니 나의 주위에 수건이만한 사람이 없어서일게다. 그러나 세상은 약삭빠른 자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약삭빠른 자만이 강자가 되는 세상이다. 일상에서 패배한 그에게 작중 화자인 나는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노랑수건, 황수건은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또 불쑥 나타나 한껏 오지랖을 풀어낼 것이니 말이다. 그 때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노랑수건, 네가 강자(强者)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신화읽기의 길라잡이;이윤기의 신화 시리즈

2011년 여강여호 서평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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