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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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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소설] 중 채만식의 『논 이야기』/「협동」(1946.10)/창비사 펴냄

파출소 한 켠 긴 의자에는 늘 한 남자가 자고 있다.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 있고 양복 윗도리는 의자에 걸쳐져 있으며 흰색 와이셔츠는 바지 밖으로 삐져나와 추레하기 짝이 없다. 신문지로 경찰서 아니 스튜디오의 환한 조명을 가리고 자고 있는 이 남자. 그도 평범한 늑대인지라 여우의 향기에 벌떡 일어나 방청객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낸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방청객들은 박수를 넘어 열광적인 환호로 이 술취한 남자의 등장을 맞이해 준다. 많은 논란 끝에 폐지되었던 KBS <개그 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코너에서 박성광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소리쳤다. 방청객들과 시청자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늘 술에 쩔어 사는 이 남자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다. 이 남자를 술푸게 하는 슬픈 세상을 알기에 술 깬 박성광은 매력이 없었다. 그러나 늘 조마조마했다. 결국 연예인 출신 문화부 장관에게 한 방 먹었고 이런저런 해명 끝에 이 술취한 남자는 어느 날 브라운관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는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지 않은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술 취한 남자의 외침에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이 코너가 사라지면서 난무했던 각종 논란과 소문들에서 찾을 수 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거라 믿는다. 국가는 한 명의 우매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졸개들에 의해 늘 권력으로 군림한다. 소위 말하는 국가 권력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의 저자 더글라스 러미스 교수에 따르면 국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한 결과로 국가 권력의 남용이 발생했다고 한다. 또 최근 100년 사이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만 2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채만식의 소설 『논 이야기』가 주목하는 대상이 바로 국가 권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45년 해방 전후의 어느 농촌 마을이다. 국가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배경이 채만식에게는 국가를 풍자하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으니 역시 풍자소설의 대가다운 면모가 짙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물론 저자는 주인공 한생원의 얄팍함도 그대로 두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채만식이 풍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국가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국가 권력의 모든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는 현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

 

독립?

신통할 것이 없었다.

독립이 되기로서니,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별안간 나으리 주사 될 리 만무하였다. 가난뱅이 농투성이가 남의 세토(소작) 얻어 비지땀 흘려가면서 일 년 농사지어 절반도 넘는 도지(소작료) 물고 나머지로 굶으며 먹으며 연명이나 하여가기는 독립이 되거나 말거나 매양 일반일 터이었다. -『논 이야기』 중에서-

 

해방의 환희로 들떠 있는 와중에 한생원에게 나라를 도로 찾는다는 것이 그렇게 기쁨일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니 그에게 독립은 구한국(구한말) 시절로 돌아가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친일파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농사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 땅의 평범한 농민이었다. 국가적 기쁨을 공유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의 허황되고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에 마냥 비난만 할 것인가!

 

한생원의 변명을 들어보자.

 

한생원네는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사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아버지때 가지고 있던 열세마지기와 일곱 마지기의 땅. 품삯 받아 푼푼이 모으고 악의악식하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피와 땀이 어린 땅이었다. 그러나 갑오농민운동 당시 열세 마지기의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동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동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정강이 살이 으깨지고 뼈가 아스러진 아버지 한태수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한태수는 동학에 가담한 일이 없었다. 이런 한생원에게 경술년 일본의 조선 합방은 그리 원통해 할 일이 아니었다.

 

그깟 놈의 나라, 시언히 잘 망했지” -『논 이야기』 중에서-

 

그러나 논 일곱 마지기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남의 세토를 얻어 보충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달리 좀 허황하고 헤펐던 한생원에게 재산이 늘리 만무했다. 오히려 고리의 소작료로 빚은 늘어만 가고 생활은 궁피해져만 갔다. 더 꼼짝할 도리가 없어 논을 팔려고 하던 차에 일본인 길천이 비싼 값에 땅을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에 귀가 번쩍 뜨여 논 일곱 마지기를 28원에 팔고 말았다. 세상이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허황된 꿈만 꾸고 있던 한생원에게 남은 건 더 궁핍해진 생활 뿐이었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다. 길천이 조선에 있는 땅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갔으니 당연 일곱 마지기 논은 한생원 땅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땅은 이미 국가의 소유로 넘어가 있었다. 제 땅을 다시 찾을래도 돈이 있어야 했다.

 

나라가 다 무어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준 게 있길래. 이번엔 일인이 내놓구 가는 내 땅을 저이가 팔아먹으려구 들어? 그게 나라야?” -『논 이야기』 중에서-

 

한 편의 농민 수탈사를 보는 듯 하다. 한생원에게 아니 채만식에게 구한말, 일제 그리고 해방 후 국가는 권력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백성들에게는 다 도적놈 그 뿐이다. 채만식은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언어로 국가 권력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있다. 한생원의 허장성세가 국가 권력의 비열함에 가려진 듯 하나 한생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립됐다고 했을 제, , 만세 안 부르기 잘 했지." -『논 이야기』 중에서-

 

지금도 국가 권력은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면서 백성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고 백성들이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파헤쳐지고 신음하고 있다. 술 취한 그 남자의 주정이 그립다.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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