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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화수분을 꿈꾸며 거리로 내몰린 우리시대 화수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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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의 <화수분>/1925년

최근 언론의 외면 속에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사측의 집단해고에 맞서 매일같이 눈덮인 아스팔트 위에서 규탄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의 임금은 고작 75만원이라고 한다.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반면 학교측이 해고된 청소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고용한 아르바이트 학생들의 일당이 최고 12만원인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실소마저 자아낼 수 없는 현실에 막막해질 뿐이다.

한편 작년 7월, 결정시한인 6월30일을 넘기면서까지 노동계와 경영계 사이에 지루하게 진행된 2011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4320원으로 결정됐다. 2010년의 4110원에서 고작 210원 인상된 금액이다. 실업난과 치솟는 물가상승률을 도외시한 비현실적인 결정이다. 게다가 틈만 나면 '서민'을 외치던 정부는 팔짱만 낀채 협상과정을 수수방관했다. 이는 결국 강자일 수 밖에 없는 경영계에 대한 암묵적 지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월 100만원 이하로 생활하는 노동자수가 4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발전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희생만 강요당한 채 최저생활임금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전영택의 단편소설 『화수분』을 읽으며 눈물만 흘릴 수 없는 이유는 소설 속 화수분이 현실에서는 수백만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물결이 넘실대던 1920년대 주인공 화수분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단지 눈물이라는 감동만 기대했을까? 저자는 독자들에게 빈곤에 대한 사회구조적 고민들을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 『화수분』을 읽어보았다면 주인공의 이름인 화수분이 지극히 반어적 표현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극빈층 노동자를 화수분이라 햇으니 말이다. 저자는 빈곤에 대한 사회구조적 모순들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이런 반어적 설정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짧은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수분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한다.

옛날 중국의 어떤 사람이 요리집에서 돈을 탕진하고 떠나올 때 주인이 노자돈에 보태라며 절구를 하나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보니 이 절구는 그저그런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 절구 속에 무엇이든 넣으면 넣는대로 가득 쏟아졌다고 한다. 비지 않는 곳간인 셈이다. 이 절구를 화수분이라고 한다.

주인공 화수분은 요즘으로 치면 일용직 노동자다. 그러나 일거리가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내에 딸린 자식이 둘씩이나 된다. 한겨울을 날 이불도 없고 매일매일 굶는 건 예사다. 이들에게 첫째 아이의 입양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낯선 이를 선뜻 따라나서는 첫째 아이의 철없는 행동이 읽는 내내 마음을 더욱 짠하게 한다.

"그래, 제가 어쩌나 보려고, '그럼 너 저 마님 따라가 살련? 나는 집에 갈 터이니' 했더니 저는 본체만체하고 머리를 끄덕끄덕해요. 그래도 미심해서 '정말 갈 테야. 가서 울지 않을 테야?' 하니까, 저를 한 번 흘끗 노려보더니 '그래, 걱정 말고 가요' 하겠지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버리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화수분』 중에서-

첫째 아이를 떠나보내고 심난하던 차에 화수분은 시골에 있는 형이 다쳐 일할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양평으로 떠나게 된다. 겨울 나기 전에 돌아온다던 남편이 김장 때가 지나고 입동이 지나도 오지않자 아내는 둘째 아이와 함께 남편이 양평으로 길을 재촉한다. 그냥 그대로 만났으면 좋으련만! 신은 늘 가혹한 시련을 주는 법이다. 아내의 편지를 뒤늦게 받은 화수분도 급히 서울을 향해 떠났으나 둘은 이튿날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 어떤 고개 소나무 밑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이튿날 아침에 나무장수가 지나다가 그 고개에 젊은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 가운데 아직 막 자다 깨인 어린애가 등에 따뜻한 햇볕을 받고 앉아서, 시체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어린것만 소에 싣고 갔다." -『화수분』 중에서-

저자는 이 혹독한 현실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지 아이만은 비극적 결말에서 비껴가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 내내 저자가 보여주려 한 것은 희망보다는 어쩔 수 없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현실이다. 저자가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화수분』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에 대한 고민을 하지않을 수 없다.

장미빛 미래를 담보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자들이 꿈꾸는 화수분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단지 최소한의 생활임금만이라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권력을 배경삼아 노동자 탄압을 노골화하고 있고 권력은 재래시장 돌아다니며 '서민장사'에만 몰두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소설 『화수분』을 눈물만 질질 짜며 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수분을 꿈꾸는 우리시대 화수분들은 오늘도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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