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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혜선은 왜 이혼 대신 자살을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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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의 <혜선의 사>/1919년


1879년 발표된 헨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은 연극이 공연되지 못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설정을 담고 있었다. 주인공 노라는 '다람쥐'나 '종달새'로 불리면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녀의 역할은 남편을 즐겁게 해주는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라는 집을 나가는 것으로 여자로서 아내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헨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은 '여성해방운동의 바이블'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노라의 가출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을까?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가부장적 유교 전통의 뿌리가 견고한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성평등을 위한 법적 장치들이 마련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남성우월적 가치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고 심지어 여성들도 겉으로는 성평등을 주장하지만 일상에서는 수백년간 지속되어온 가부장적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영택의 소설 『혜선의 사』는 지속될 수 없는 결혼생활을 이혼 대신 자살로 마무리한 신여성을 통해 남성우월적 결혼 제도의 구습을 벗어나지 못한 신여성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1919년에 발표된 소설이기는 하나 아직도 이혼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소설이라 하겠다. 

스스로 눈을 뜨지 못한 신여성의 한계

주인공 혜선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울S여학교를 다니는 신여성이다. 18살에 결혼한 유부녀이기도 하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방학이 되어 찾아온 절친한 친구이자 일본 유학생인 정자의 파격적인 발언이 혜선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만다.
 

나는 이혼할 사람은 해버리는 것이 옳은 줄 알아. 나더러 나쁜 년이라고들 할는지 모르겠지마는 좀 생각을 해보아! 세상에 제일 어리석은 물건은 조선여자야! 사나이는 싫다는데 어쩌자고 부득부득 살자고 한단 말이야?...이왕 아무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지내는 사람은 몰라도 한 번 눈을 뜬 다음에야 누가 그 어리석고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하려고 하겠소.”

남편도 일본 유학생이었으니 정자의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혜선도 알고 있다. 혜선도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남편을 알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사랑 대신에 밤낮 안방구석에서 종노릇만 하고. 남편이라고 말도 별로 못해보았는데요.”

 

심지어 혜선이 알수없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근처 여관에 묵고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남편이다. 그러나 혜선에게 이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여성이지만 여전히 일부종사의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사촌오빠마저도 이혼을 종용하기에 이른다.  

 

내가 편지로도 그 말을 늘 한 듯싶다마는 자기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느니라.너는 아직도 나이도 과히 많지 않은데 이제라도…”

혜선은 왜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포기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만 할 뿐 현실과 싸울 용기가 없다. 아니 봉건적 구습이 여전했던 당시 아무리 신여성이라지만 이혼한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을 감내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혜선에게 남편이 친정 아버지에게 이혼을 통보했다는 정자의 말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혼은 절대 할 수 없었던 사회적 압박에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였다. 현실과 싸울 수 없었던 나약한 신여성, 아내 혜선은 한강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노라와 혜선의 엇갈린 선택

 

[인형의 집] 노라와 『혜선의 사』혜선은 동시대 여성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때와 장소는 달랐을지언정 봉건적 구습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위주의 결혼생활을 견디며 살아가던 그들의 선택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강도로만 보면 자살을 선택한 혜선의 반항이 강력해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노라의 가출이 여성으로서 아내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해 과정이라면 혜선의 선택은 이런 고민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라의 가출이 결혼생활과 남녀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고민의 여지를 남겨둔 반면 혜선의 자살은 이런 문제의식이 개인적 수준에 그치고 만다. 

21세기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노라는 여전히 가출중이고 혜선의 자살은 아직도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는 현실은 아닐런지....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헛되도다! 헛되도다! 

주인공 혜선의 현실을 찾아가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영택의 소설 『혜선의 사』는  당시로서는 쉽지않았던 결혼이나 이혼, 여성에 관한 문제들을 제한적이나마 언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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